인연의 감사함에 대하여
선무 최창원

“살면서 네 삶을 가장 대표할 수 있는 7가지 장면을 생각해볼래?”
선각의 갑작스러운 문자메시지였습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선각은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고 했습니다. 공황장애를 겪어본 적이 없는 저는 그저 선각의 질문에 성심껏 답변하기 위해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그 짧은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농구를 하려고 뛰어나갔던 장면, 모의고사가 끝난 날 혼자 야자실에 남아서 공부했던 장면, 대학생이 되어 홀로 자유롭게 여행을 다녔던 장면, 대학교에서 복학생 선각을 처음 만났던 장면과 몇 년 후 다시 만나 입도하게 된 장면, 포덕소 공사를 하면서 정성을 들여 후각을 찾았던 장면, 후각이 임명을 모셨던 장면. 길지 않은 삶을 돌아보며 여러 장면이 더 있었지만, 선각과 후각의 존재가 제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마운 인연입니다.
다른 장면들도 돌이켜보면 모두 인연이었습니다. 함께 공을 던지던 고등학교 친구들도 인연이었고, 시험이 끝난 날에도 야자실에 남아 공부할 수 있게 동기를 주신 할아버지와의 약속도 인연이었고, 홀로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때도 늘 걱정해주시고 응원해주셨던 부모님, 여행하면서 만난 수많은 고마운 인연이 있었습니다. 살면서 가장 내 삶을 대표할 수 있었던 순간은 내가 아니라, 고마운 인연들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대학교에서 처음 선각을 만났을 때는 선각의 자신감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대학원생이 된 선각과 복학생이 된 제가 우연히 다시 만나 선각이 다니는 회사에서 같이 일하게 되었습니다. 전 열정적이며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선각의 모습을 닮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선각을 따라 포덕소에 오게 되고 입도할 때도 사실 그 당시엔 도담이 잘 이해되지도 않았고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지만, 선각을 믿고 입도식을 했던 것만은 기억이 납니다.
입도하고 선각과 함께 수도를 하게 되면서 닮고 싶었고 배우고 싶었던 부분 때문에 오히려 불평과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게 최선을 다 해주는 선각의 마음을 어느새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고, ‘내가 이만큼 선각의 말을 따라주는데, 선각은 얼마나 내가 더 하기를 바라시는 것이지?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선각은 더 해주셔야 하는 건 아닌가?’라는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후각을 찾고 나서 선각은 포덕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선각에게 ‘후각만 찾으면 다 책임져줄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막상 후각을 찾고 나니까 나 몰라라 하다니’라는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선각 없이 후각을 대하다 보니 선각의 심정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후각을 어떻게든 잘 되게 해주려고 마음을 쥐어 짜내기도, 스스로 지키기 어려운 말임을 알면서도 후각을 위해 그 말을 해주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움직이려 하지 않는 제 마음에 괴리감과 자괴감을 느끼고…. 물론 그 당시 선각의 마음이 꼭 저와 같지는 않았겠지만, 후각의 모습을 통해 저의 모습을 보면서 그간 얼마나 선각이 괴로웠을지, 제가 얼마나 선각을 괴롭게 했을지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선각분들이 후각을 잘 이끌어주셔서 후각이 선무 임명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각에게는 제가 선각에게 받았던 것만큼 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뿐이었습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고 선각이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돌아온 선각은 예전에 함께 했을 때와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었습니다.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고 하였고 예전처럼 무리해서라도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힘든 것은 힘들다고 하고 무리인 것은 무리라고 얘기하면서, 다만 할 수 있는 것에는 마음을 내서 한다고 했습니다.
예전보다는 조금 힘이 빠진 것 같은, 때로는 힘들어하는 선각의 모습에 과거의 저라면 왜 더 많은 것을 해주지 않느냐며 바라고 불평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존재 자체로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선각이 힘들어하는 부분을 책잡고 불평하는 것보다, 제가 힘이 되어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회사에 다니면서도 상사들과 동료, 후배들을 보며 왜 제 역할을 하지 않느냐며 책잡고 불평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 사람들이 떠나고 빈자리가 생기고 나서야 그들을 탓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힘이 되어주려고 하지 않았는지, 함께 헤쳐 나가려고 하지 않았는지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제 기대만큼 완벽한 선후배나 동료는 없을 텐데, 제 기대와 욕심으로 그들을 재단하고 불평불만을 가졌던 것인지, 돌이켜보면 모두 고마운 인연이었는데, 서로 힘이 되어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와 작은 친절을 베풀지 못했는지 말입니다.
돌아온 선각의 질문은 제게 이 중요한 이치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지나온 삶의 일곱 가지 장면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삶과 수도 생활에서 만날 인연에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서로 힘이 되어주고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가는 수도인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의 풍파 속에서 휩쓸리고 때로는 불평과 불만 속에 희망이 희미해질 때도, 항상 마음의 고향이 되어주는 방면과 마음의 중심이 되어주는 상제님의 큰 도가 있음에 감사합니다.
